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l 비채(2023) 흔히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어머니로 비유된다. 바다와 어머니를 뜻...
흔히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어머니로 비유된다. 바다와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언어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소피아의 바다에는 독성 해파리가 가득하고 어렵게 짬을 내 바닷물에 뛰어들 때마다 인정사정없이 해파리에 쏘이고 만다. 인정사정없기로는 소피아의 어머니 로즈가 한 수 위다. 로즈는 몇 년째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리 마비 증상을 겪고 있고, 우등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은 인류학자 소피아는 어머니 로즈의 치료를 위해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스페인의 유명 클리닉으로 떠난다. 이런저런 고통을 호소하며 딸의 전적인 돌봄을 받는 어머니는 자신이 딸의 인생을 담보로 잡고 있음을 인정하기는커녕 딸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어머니인 자신에게 얹혀산다고 나무란다.
그러나 영국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어렵게 찾아간 스페인의 유명 클리닉 의사 고메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단과 처방으로 모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고메스는 로즈의 처방 약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작 다리 마비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소피아가 보기에도 로즈의 다리 마비는 ‘간헐적’ 증상이다. 어느 날엔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 것 같다가도 소피아만 곁에 있으면 도통 움직일 줄을 모른다. 도대체 로즈를 마비시킨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소피아도 의사 고메스도 독자들도 소설을 읽는 내내 품고 따라가는 빵부스러기 같은 질문이다. 혼자서 어머니를 감당하기가 벅차진 소피아는 오래전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고향 그리스로 떠나 딸 또래의 여자와 재혼해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를 찾아간다. 오랜만에 만난 딸 앞에서 데면데면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리스인 아버지는 다소 비겁해 보이고 소피아와 매일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아버지의 현재 부인 알렉산드라다. 아버지는 소피아에게 발음하기 어려워 늘 곤혹스럽게 하는 파파스테르기아디스라는 성을 물려주었을 뿐 어떠한 경제적, 정서적 지원도 거부한 반면, 돌봄의 임무 때문에 학업과 경력을 포기하고 유럽의 긴축재정 시대를 힘겹게 통과해야 하는 현실의 고난을 공유하는 사람은 오히려 알렉산드라다. 실제로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소피아의 어머니 혹은 언니 같은 느낌이 든다며 앞으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자고 제안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소피아는 어머니가 고메스의 진료를 거부하고 영국의 한 병원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설상가상으로 태연히 산책하는 어머니 로즈를 우연히 목격한다. 이 ‘간헐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소피아는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대형화물트럭이 오고 있는 도로 한가운데 버리고 가버린다. 이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챕터의 제목은 ‘모친 살해’이다. 어머니 로즈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목숨을 구했을까? 소피아는 진심으로 로즈를 죽이려 한 걸까? 대답 대신 이 책의 영국판 원서 첫머리에 제사로 사용한 엘렌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 한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이 낡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오직 당신의 몫이다.” 스페인어로 해파리가 메두사인 걸 생각하면 이 문장은 소피아가 스페인의 바다에서 해파리에 쏘일 때마다 따끔하게 전해 들은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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