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중국에 가까웠던 오키나와, 어떻게 일본 땅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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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중국에 가까웠던 오키나와, 어떻게 일본 땅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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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 류구를 ‘대(大)류구’로, 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

규슈와 타이완은 세계에서 37번째, 39번째로 큰 섬이다. 두 섬 사이를 동북-서남으로 잇는 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수백 개 섬이 류구 열도다. 이 섬들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약 4642㎢다.

630~665년 기간에는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가는 항로였다. 백제가 멸망 전에 왜의 중국 왕래를 도와주던 상황을 보여준다. 702~752년에는 류구 항로를 이용하다가 773~838년에는 규슈 연안에서 닝보 방면으로 곧장 건너가는 항로로 바뀌었다. 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7~8세기에 류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커지던 상황이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나타나 있다. 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 필리핀 엽서에 그려진 오스트 로네시아 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갖춰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 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인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 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년, 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

명나라의 해금 정책 아래 류구국은 조공국의 특혜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1609년 사쓰마번의 류구 정벌은 임진왜란 때의 비협조를 빌미로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구메무라는 홍무제가 보내준 36가구로 출발한 동네라 하는데, 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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