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책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참 무던히도 열심히 책을 이것저것 사서 모으며 살았다. 중간에 장마에 침수되어 날려먹기도 하고, 이삿짐 와중에 폐품으로 잘못 넘겨져 영영 잃어버린 것도 적지 않지만, 기이하게도 장서량이 줄어들 때마다 마치 벌충이라도 하려는 양 더 맹목적으로 책을 다시 끌어 모으곤 했었다. 그 결과는 아껴 모았다면 집 한 채 장만했을지도 모를 거대한 책의 무더기와 그 곁에서 새우잠 자는 필자의 초상이다.내용이 좋아서 애착을 가지는 책이 있고, 그 책을 수중에 넣던 과정이나 다시 삶에 사연이 깃들어 유독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책을 구하느라 제법 많은 것을 포기해가면서 어렵게 마련한 책들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암울한 업계 전망 가운데 전통적인 북 디자인을 고수하는 기쿠치 노부요시와 그의 직계 제자로 일가를 이루는 데 성공한 제자 미토베가 마침내 한자리에 만난다. 제자의 작품에 대한 소회와 함께 동료로서 서로의 책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대목에선 사제 관계를 떠나 신구세대 북 디자이너의 교류를 구현하는 장면으로 관객에게 압축적으로 선보여진다.그 다음, 여섯 번째 장은 '만지다'란 표제다. 그로 하여금 북 디자인의 세계로 인도하게 했던 모리스 블랑쇼의 신간을 수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쿠치 노부요시는 떠맡게 된다. 그것도 그가 청년기를 보낸 1968년 혁명 당시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대담집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시작을 복기하며 주인공은 정열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이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단종 예정된 고급종이를 공장에 방문해 선별하고 색상을 손본다.
여기에서 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누군가는 그저 기능적인 역할로 치부할지 몰라도 그 스스로 일가를 이룬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는 자신만의 책에 대한 철학과 함께 자신이 그 책을 완성시켜낸다는 자부심과 그 일의 엄중한 무게감까지 단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지언정 온전히 화면의 공기 속에 자신의 이념을 채워내고 있었다.히로세 나나코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서 착실히 배웠을 대상에 대한 존중과 함께 장인의 인문학적 태도에 깊이 감화되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주변 지인들이 기쿠치 노부요시에게 보내던 무한대의 신뢰와 경외심을 감독 또한 한 차례도 놓지 않고 카메라를 들었음직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라면, 잘 만들어진 책 한 권의 향기에 취해가며 조심조심 띠지를 만지는 순간에 기쿠치 노부요시의 손길을 떠올릴 이가 제법 여럿 나올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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